2024년 12월, 펜타그램이 미국 연방정부 포털 Performance.gov를 위한 새 아이덴티티를 공개했던 날, 인스타그램 게시물에는 좋아요가 1만 6천 개 넘게 붙었고, 댓글창은 전쟁터가 될 정도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습니다. 디자인의 완성도나 메시지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 사이트에 쓰인 1,500여 점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이미지 생성 AI 서비스인 미드저니로 완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죠. 디자인 도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는 평가부터 영혼 없는 디자인이라는 평가, AI가 가진 저작권 문제나 인간성의 상실에 이르기까지 실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들을 절도 혐의로 고발한 사례까지 있었으니까요.

작업을 담당한 펜타그램 뉴욕의 파트너 폴라 셰어는 해당 작업을 둘러싼 논란을 두고, 작업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스타일 학습에 사용된 모든 일러스트는 이미 일러스트레이터인 브루노 베르갈로가 먼저 만든 것이고, 단순히 프롬프트를 쓰는 것만으로는 재현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들은 브랜딩을 하려 한 것이지 일러스트 작업을 위해 고용된 것이 아니며, 작업 과정과 일러스트레이션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도 정부 간행물마다 달라지는 스타일로 인해 브랜딩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한 가지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데스크톱 프린트(DTP)의 등장이었죠. 과거 로고는 격자와 제도, 고무 접착제와 칼을 통해, 일러스트는 실제 회화를 통해 그려졌지만, 맥과 어도비의 등장은 브랜드 디자인 작업의 방식을 급격하게 변화시켰고, 그것은 지금 AI의 등장과 다르지 않다고 말이죠. 그의 설명이 모든 디자이너들에게 위안을 준 것은 아니지만,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방식 또한 브랜딩 자체와 마찬가지로 AI가 있기 이전부터 도구에 의해 변화되어 왔으며, 자동화된 브랜드에 대한 갈망 또한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로그래밍된 브랜드
1964년, 디자이너 칼 게르스트너는 『Designing Programmes』에서, "디자이너는 하나의 해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 해답들을 낳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사람"이라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가 내려진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컴퓨터는 거대한 메인프레임의 형태였고, 디자인 스튜디오에 들어올 정도로 작아진 시기가 아니었으며, CG는 이제 막 연구 단계에 있었으니까요. 그가 말한 프로그램은 격자와 순열과 조합, 손과 인쇄기로 구현되는 유한한 규칙 체계였습니다. 이 선언은 앞서 언급된 브랜드와 디자인의 국제주의의 정점을 찍은 말이기도 하지만, '생성형 아이덴티티'라고 부르는 것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AI를 비롯한, '프로그래밍된 브랜드'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브랜드의 디지털화가 본격화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입니다. 1984년 네덜란드의 클레센스 사가 출시한 캐드 전용 컴퓨터 에스테데스(Aesthedes)는 당시 고성능인 축에 속했던 CPU였던 68000 프로세서를 무려 10개나 사용하고, 6개의 스크린을 사용하는 그래픽 디자인 전용 워크스테이션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식들은 고안이 되었지만, 가장 오늘날의 형태에 가까운 설계 철학을 지닌 디자인 툴은 이 컴퓨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컴퓨터를 통해 하이네켄의 병 라벨, 그리고 네덜란드 25길더 지폐의 일부가 디자인되었지만, 정작 이 장비는 매킨토시가 출시되자 몇 년 만에 도태되었습니다. 가벼운 범용 장비가 무거운 전용 장비를 대체하는 순간이었죠. 몇년 뒤 QuarkXPress와 Adobe Illustrator, PostScript, Photoshop 등이 등장했고, 브랜딩은 활자와 모눈종이, 제도의 시대에서 디지털의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의 일부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경우가 존재합니다. 스테판 자그마이스터가 2007년에 만든 포르투의 카사 다 무지카 아이덴티티에는 로고의 색상을 지정하는 소프트웨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OMA가 설계한 건물의 다면체 실루엣을 모티프로, 이미지 입력값에 따라 색상을 추출해 이미지에 맞는 로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죠. 이 작업은 뉴욕 현대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미술관은 로고 작업 자체가 아닌 아이덴티티 로고 제너레이터, 즉 소프트웨어를 소장하는 형태입니다.
현재 KAIST의 산업디자인학과 부교수로 재직중인 강이룬 디자이너가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MIT 미디어랩의 아이덴티티 또한 프로그램을 활용한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의 전형으로 여겨집니다. 고유의 순열을 알고리즘을 통해 만들고, 웹 인터페이스를 통해 출력함으로서 구성원 각자가 자기 로고를 골라 명함에 찍을 수 있도록 만듦에 따라, 아이덴티티의 소유 단위를 조직에서 개인으로 확장한 사례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는 미래의 25년 동안 4만개의 아이덴티티를 이를 통해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2014년 펜타그램이 만든 새로운 로고로 대체되었고, 로고의 플렉서블리티는 MIT 내부의 조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패턴화와 색 조합을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들어낸 사례들은 꽤 많이 존재했습니다. 제너러티브 디자인 전문가 파트릭 휘브너는 룩셈부르크 필하모니를 위해 실연 사운드에 반응하는 아이덴티티를, 와인 브랜드 BRUTE를 위해 포도밭 기상 데이터를 서사 축으로 삼는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죠. 이를 파브릭 휘브너는 '크리에이티브 코딩'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졌던 브랜드에 논란이 없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규칙을 사람이 쓴다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프로그램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아이디어 그 자체를 생성하거나 어떠한 제안을 하지는 않았고, 어떠한 아이디어를 복제하거나 재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도 않았으니까요.
생성된 브랜드
생성형 AI는 모든 저작물에 그 저작자의 노고와 의도가 들어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뒤흔들어 놓은 사건입니다. 디자이너가 규칙을 명시하고 기계가 이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는 의도만 명시하고 기계가 자신이 그동안 학습해 온 모든 데이터들 중 그 의도에 가장 가까운 확률적 평균을 끌어올리는 형태로 변화된 것이죠. 그 과정에서의 결과물은 예측 가능한 프로그램이 아닌, 결과물 중 가장 의도에 맞는 제안 더미가 된 셈입니다.

AI가 브랜드적 표현을 만들 정도로 완숙하기 전까지, AI 생성물을 브랜드가 대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복제품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고, AI를 활용한 브랜딩이나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 아마 2022년 크래프트 하인즈가 캐나다의 에이전시 리싱크와 함께 만든 하인즈 케첩 광고일 것입니다. 이미지 생성 AI인 DALL-E에 '케첩'을 입력해 하인즈 케첩 병 모양을 얻어냈다는 이 광고를 통해, 'AI조차 케첩 하면 하인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죠. 물론 같은 프롬프트로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식의 재현성에 대한 반박이 이어졌지만요.

그러나 AI가 급격하게 발전함에 따라, Performance.gov 사례와 같이 직접적으로 브랜드 크리에이티브에 AI를 활용하는 시도가 늘어났고, 결국에는 음악이나 광고, 미술 등 다른 크리에이티브한 영역과 마찬가지로 브랜딩에도 어느 정도 AI가 개입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브랜드들은 AI의 어색함을 스타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스미스&딕션이 AI 영양 앱 Alma의 아이덴티티에서 AI로 만든 이미지의 어색한 뭉개짐을 오히려 콜라주로 승화해 "즐거운 식사"의 은유로 삼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자신들이 '의도'만큼은 놓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는 항상 따라붙었지만요.
이러한 과정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제기됩니다. 우선, 과연 AI로 만든 스타일들이 디자이너의 의도의 결과이느냐, 혹은 저작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모아 놓은 학습의 결과이냐에 따른 것입니다. 앞선 Performance.gov 사례에서는 직접 디자이너의 손으로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그 스타일의 저작권은 보증되겠지만, 그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한 모델이 무엇을 학습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폴라 셰어가 "자신들의 작업이 절도라는 비난이 싫었다. 내 남편도 일러스트레이터인데!" 라고 말할 때, 그 억울함만큼은 진심이었겠지만 논점을 제대로 찌른 건 아닐 것입니다.
또 다른 논란은, 이러한 작업 방식이 지속되었을 때 나오는 스타일이 과연 평균 이상의 창의성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AI는 일종의 확률 모델이기도 하며, 확률 모델은 학습 분포의 중심으로 수렴하니까요.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성할 수록 개별 이미지의 표정은 옅어지고 전체는 매끈해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정부 포털에는 미덕일 수 있으나, 차별화가 목적인 브랜드에는 정확히 반대 방향의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최근 범람하는 AI 광고나 홍보물의 스타일에서, 브랜드 간의 차이보다는 만든 도구의 공통점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이를 증명하죠.

또 다른 변화는 브랜드를 뒷받침하는 그래픽을 만드는 툴 자체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왔습니다. 툴 자체를 만드는 것은 자그마이스터의 방식이나 파트릭 휘브너의 '크리에이티브 코딩'과 동일한 접근입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AI를 통해 그 비용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바이브 코딩'의 물결은 브랜드 디자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누구나 그래픽적 의도를 구현할 수 있는 툴을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스미스앤딕션에서 리뉴얼한 'Calendly' 브랜딩에서, AI는 이 두 가지 접근을 모두 취했습니다. 디자이너인 개빈 포텐자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책상 위로 쏟아지는 아침 햇빛, 해 질 녘 구름의 가장자리, 청록빛 물에 부서지는 빛" 같은 이미지를 미드저니를 통해 뽑았고, 처음에는 이걸 브랜드 전면에 쓸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일관성과 확장성이 부족해 최종적으로는 배경과 컬러 레퍼런스로만 남았죠. 그래도 건진 게 있다면, 예측 불가능한 색 조합 덕분에 전형적인 SaaS 서비스와는 다른 색상 팔레트를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후 그는 피그마 메이크로 "패턴리(Patternly)"라는 패턴 생성기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캘린더 블록에서 출발한 형태가 시간대와 미팅의 성격에 따라 다른 패턴으로 변주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그 결과물이 웹사이트에서 배경과 전경 사이의 그래픽 레이어를 담당하는 식이었습니다. 코드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만든 도구가 브랜드 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죠.
이 흐름은 지금 제가 속한 오피스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기획자인 저조차도 필요에 따라 제안을 위해 바이브 코딩으로 만든 그래픽 툴을 만들어 활용한 바 있습니다. 과거 디자인 전문가와 프로그래머가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이러한 방식의 작업을 디자이너 혼자서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구들이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들기 쉽다는 것은 곧 버리기도 쉽다는 뜻이니까요. 때로 이런 프로젝트가 폭주하게 될 때, 유지보수와 버전 관리, 검증 체계가 없는 일회용 도구만 쌓이게 되고, 클라이언트 쪽에서는 유지보수가 불가능한 코드가 브랜드 가이드 안에 남게 됩니다. 이러한 스타일이 3년 뒤에도 작동할 만한 것인지, 그 때 어떻게 이 코드를 고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도구가 디자인 뒤의 판단을 숨기는 점도 있습니다. "툴이 뽑아준 것"이라는 말은 근거 없는 선택의 훌륭한 알리바이가 되기도 하죠. 규칙을 코드로 옮기는 순간 그 규칙은 검토 대상에서 인프라로 승격되고, 인프라는 다시 바뀌기 전까지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AI가 읽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된 브랜드
마지막 변화는 브랜드를 관리하는 쪽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AI를 활용한 브랜드 인텔리전스를 제시하는 Frontify가 밝힌 바에 따르면, 마케터의 85%가 이미 AI 콘텐츠 도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브랜드의 가이드와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업에는 브랜드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열의 여덟은 브랜드 콘텐츠를 원래 의도에 맞지 않게 만드는 이른바 '오프-브랜드 콘텐츠' 문제를 갖고 있죠.
과거의 기계는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읽을 수 없었지만, AI 시대에는 PDF화된 가이드라인 속 .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컬러·타이포·톤앤매너·소셜 규정·윤리적 이슈 등의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API와 디자인 토큰, 메타데이터와 룰 로직으로 만들고 여기에 접근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이를 학습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브랜드 AI'가 MCP(Model Context Protocol)를 통해 직접 용어의 목록을 제안해 콘텐츠를 제작하는 수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2026년 봄에는 이 흐름이 파일 이름 하나로 굳어졌습니다. 구글 랩스의 AI 디자인 도구 스티치(Stitch)가 쓰던 Design.md가 그것입니다. 프로젝트 루트에 마크다운 파일 하나를 놓고 비주얼 테마, 컬러 팔레트와 역할, 타이포그래피 규칙, 컴포넌트 스타일, 레이아웃 원칙,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반응형 동작, 에이전트용 프롬프트 가이드까지의 섹션을 적어두면 AI가 이를 읽어들여 그에 맞는 디자인을 뽑아내는 것이죠. 이 마크다운 양식이 구글에 의해 아파치 2.0 라이선스로 공개되면서 범용성을 갖게 되었고, 테크 기업들의 디자인 시스템은 이제 마크다운 언어로 규약되는 체계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브랜딩에 있어서 이것은 '브랜드 문서'의 형식이 바뀌는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브랜드 문서는 전면적인 리브랜딩을 거치지 않으면 대개 정적인 측면에 속했습니다. 브랜드가 시장 트렌드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속도, 실제 실무자가 현업에서 브랜드를 유연하게 바꾸는 속도보다 문서가 바뀌는 속도가 훨씬 느렸죠. 이제 브랜드 가이드는 책이나 PDF가 아닌, Git 저장소 안에 텍스트로 놓일 수 있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훨씬 더 유연한 체계가 되기도 했죠. 누가 언제 무엇을 바꿨는지 diff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브랜치를 따서 실험할 수 있으며, 심지어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지난 60년간 브랜드 매뉴얼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속성의 유연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은 단순히 디자인을 하거나 그 디자인을 평가하여 브랜드의 메시지에 맞는지를 평가하는 사람이 아닌, '규칙을 만드는 사람'으로 옮겨갑니다. 다시 브랜드 디자이너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사람이 된 것이죠.
물론 이러한 형식의 브랜딩이 완전히 가이드를 대체하거나, '브랜딩'이라는 활동 전부를 대체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쓴다는 것은, 곧 규칙으로 환원 가능한 것만 남긴다는 뜻입니다. design.md에는 아홉개의 세션이 지정되어 있고, 에이전트가 읽는 것도 그 아홉 개 뿐입니다. 예외, 판단, 취향, 특정한 국가나 지역, 또는 클라이언트에게만 통하는 맥락, 때로 규칙을 깨고 나타나는 기발한 상상력 같은, 브랜드를 실제로 브랜드답게 해 주는 요소들은 오히려 가이드에 포함되기 어려워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있는 패턴의 갯수는 오히려 우리의 계산 안에 들어오는 정도로 좁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밋밋하게 평균화된 브랜드의 세계일지도 모르죠.
브랜딩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AI와 프로그래밍을 통해 자동화된 브랜드는 어쩌면 게르스트너가 60여 년 전 고안한 디자인 프로그램의 연장선상이자, 그 아이디어의 가장 치밀한 구현일지도 모릅니다. 디자이너의 수고는 더 적게 들이면서도 풍부한 표현이 가능한 브랜드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막상 이를 고안하고 실행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것이 현실이었죠. AI는 그 두 비용 모두를 무너뜨렸습니다. 여러 프로그래머가 달려들었을 카사 다 무지카의 제너레이터를 이제는 '딸깍'으로 구현 가능해졌고, 1,500점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소규모 팀이 만들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브랜드는 가장 먼저 기계가 읽어내리는 규칙의 집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기술적 도구의 변화에서 오는 것일 뿐, 브랜딩의 역사 자체의 궤적이 AI 때문에 변화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일 것입니다. 새로운 생산도구가 등장해 표현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은 브랜딩 뿐만 아니라 디자인 전체의 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어떠한 도구를 쓰면서 비슷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면, 다음 세대는 그 기본값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되찾곤 합니다. 사진 제판이 그랬고, 헬베티카가 그랬으며, DTP가 그래왔습니다. DTP는 90년대의 디자인을 대거 균질화했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 다음 10년의 좋은 작업들이 나왔죠. 지금 현재 이어지고 있는 AI 크리에이티브의 범람과, 이를 거부하고 휴먼 터치를 되찾자고 하는 메시지들이 모두 이런 흐름 속에 속합니다.
결국 AI시대 속 브랜딩의 역사는 "AI를 얼마나 잘 쓰는가"가 관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AI를 통해 어떤 기본값이 생겨나고 있으며, 그 기본값을 거부하기 위해 어떤 몸부림이 일어나는가에 의해 역사가 쓰일 것입니다. 어떤 브랜드에 이는 손으로 그린 스타일 원본일 수도, 어떤 브랜드에게는 사람이 직접 나오는 크리스마스 광고일 수도, 또 어떤 브랜드에게는 끝내 마크다운에 남지 않고 사람의 판단에 의해 만들어 낸, 브랜드 가이드를 벗어나면서도 브랜드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는 어떠한 크리에이티브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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