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래미안은 왜 초록을 버렸나, 그리고 주거 브랜드는 왜 점점 서로 비슷해지는가

2026년 8월 31일, 삼성물산이 래미안의 새 아이덴티티를 공개했습니다. 기존의 색상은 남긴 채, 다소 NASA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던 서체로 바꾼 지 5년 만의 리뉴얼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색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래미안을 상징해 온 것은 옥색과 회색의 세 기둥이었습니다. 형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그 색상만큼은 익숙했을 것입니다. 직전 리뉴얼에서 '來美安'이라는 한자를 지운 래미안은 이번에는 색상마저 걷어냈습니다. 서체의 완성도나 브랜드 철학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도 이 '블랙 앤 화이트'였습니다. 고급스럽고 단순해졌다는 반응과 특징이 사라졌다는 반응이 엇갈렸고, 아디다스나 상주 완장이 떠오른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저는 디자인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래미안은 이제 자이나 푸르지오와 경쟁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이어 기사를 읽다가 새 슬로건을 보았습니다. "높이에서 깊이로", "깊이가 다른 삶(Deepen Your Life)". 저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습니다. 브랜드 메시지를 비웃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거 브랜드의 세계에서 "높이"를 벗어나겠다는 말은 좀처럼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목표, 비슷한 변화들
최근 2년 사이 1군 주거 브랜드들이 줄줄이 리뉴얼을 했습니다. 우선 2024년 11월 자이가 22년만에 브랜드 리뉴얼을 진행했죠. 제 눈으로는 아직도 그 형태의 불균형감을 어떻게 정당화해야 할 지 모르겠고, 일론 머스크의 회사인 X AI 로고가 매우 깊이 연상되지만, 어쨌든 자이의 브랜드 인식이 당시 있던 부실공사 논란으로 상당히 훼손되었던 것을 상쇄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합니다. 이어 2026년 4월에는 아이파크가, 6월에는 힐스테이트가 브랜드 런칭 20주년에 맞추어 리뉴얼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8월에 래미안이 그 정점을 찍은 것이죠.
개별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변화의 방향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로고에서 장식을 걷어내고, 획과 비례를 정리하며, 여백을 늘립니다. 형태를 줄여 핵심만 선명하게 남기는 '덜어내기'입니다. 때로는 이를 위해 오랫동안 쌓아 온 색상 자산까지 내려놓습니다.
브랜드 업계에 있다 보면 같은 시장의 브랜드들이 한꺼번에 리뉴얼하는 시기를 마주하곤 합니다. 주거 브랜드에서도 이런 흐름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데, 제 체감으로는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이상한 점은 그때마다 서로 더 비슷해진다는 것입니다. 브랜드의 역할이 차별화라면, 왜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까요?
제 생각에 이는 한국의 주택 시장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아파트 브랜드에 요구되는 가장 강력한 역할이 '어떻게 다른가'보다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더 비싸게 팔기 위한 아파트 브랜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파트에조차 '브랜드'가 붙는 우리나라의 특이한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파트에 브랜드라는 것이 붙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압구정 현대아파트'처럼 건설사의 이름을 붙인 아파트는 있었지만, 그 이름은 독자적인 상품 브랜드라기보단 시공사의 신뢰를 보증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전환점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였습니다. 1998년 분양가 자율화로 가격을 차별화할 여지가 커지자, 그 차이를 정당화할 수단으로 브랜드가 부상했습니다. 동양대 박해천 교수의 연구는 아파트 브랜드를 "미래 자산가치에 대한 시장의 집합적 기대를 응축하고 유통하는 금융적 기호"로 규정하고, 이 시기를 아파트가 소비재이자 자산 상품으로 재구성되고, 브랜드가 주거 가치와 사회경제적 위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은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브랜드는 더 좋은 집을 약속하는 동시에, 더 높은 자산가치에 대한 기대를 담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99년부터 2003년까지, 지금 우리가 아는 아파트 브랜드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99년에 롯데캐슬과 타워팰리스, 대림 아크로빌이 생겨났고, 2000년엔 래미안과 SK뷰, 현대홈타운, 2001년엔 아이파크와 위브, 2002년엔 자이와 더샵, 2003년에는 푸르지오와 어울림이 생겨났죠. 현대건설은 현대홈타운이 기대만큼 반응을 어디 못하자, 2006년 결국 다른 브랜드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브랜드를 갈아치웠는데, 그게 바로 힐스테이트입니다.
브랜드는 곧바로 숫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반포주공 2단지 시공사 선정에서 삼성물산이 LG건설을 근소한 표차로 이긴 이래, 새로운 평면과 건축 설계, 조경 뿐만 아니라 '브랜드가 곧 프리미엄'이라는 위계질서가 경험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앞선 논문에서 인용한 2002년의 연구에서는 이미 소비자들이 비브랜드 아파트보다 래미안에 3.3㎡당 476만 원의 프리미엄을 추가로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브랜드 없는 아파트를 찾기 어려워질 무렵, 시장은 한 단계 위의 이름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엔드 주거 브랜드입니다. 2013년 대림이 반포에 아크로를 적용한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브랜드가 입지를 높이기도 했지만, 반포라는 입지가 브랜드의 격을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아크로의 정체성이 정비되고 디에이치, 르엘, 오티에르, 드파인 등 별도의 고급 브랜드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프리미엄 위의 프리미엄'이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19년 11월 아크로의 BI가 정식으로 잡힌 이후, 대우 써밋이나 현대 디에이치, 롯데 르엘, 포스코의 오티에르와 SK의 드파인이 스스로를 하이엔드 브랜드로 정의하며 등장했죠.
래미안과 자이는 이 흐름에서도 단일 브랜드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미 최상위권으로 인식되는 이름 위에 별도의 브랜드를 얹으면, 기존 브랜드를 스스로 한 단계 낮추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그 명성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삼성물산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정비사업 신규 수주에 사실상 공백을 보이는 동안, 경쟁사들은 하이엔드 브랜드를 앞세워 강남권에서 입지를 넓혔습니다. 당시 한 보도는, "경쟁사들이 고급 주거 브랜드를 출시하며 강남권 재건축에 특화 설계를 대거 적용하는 만큼 예전보다 래미안과 다른 브랜드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흑석9구역 재개발 조합이 입찰 자격에 하이엔드 브랜드 보유를 명시한 것은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출시 시점과 정비사업 제안 실적에 관한 조건까지 붙으면서, 래미안에 대한 선호와 별개로 삼성물산의 참여가 제한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시장이 브랜드의 '격'을 별도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오래된 명성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문턱이 생긴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죠.
전혀 반대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한남4구역에서는 래미안을 내세운 삼성물산이 디에이치의 현대건설을 이겼습니다. 래미안과 삼성이라는 이름의 힘이 여전하다는 증거입니다. 한편 압구정 수주전에서는 '현대'와 '압구정'의 이름조차 바꾸고 싶지 않아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조합원들을 위해 래미안 대신 '컬리넌'이라는 프로젝트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 상반된 장면은 래미안의 힘과 한계를 함께 보여줍니다. 브랜드의 명성은 강력하지만, 모든 입지와 모든 기대를 하나의 이름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이엔드 브랜드와 격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의 브랜드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는(Buying) 집'을 위한 격 맞추기
결국 이 '격 맞추기'가, 모든 주택 브랜드가 유사하게 보이는 동질화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주택이라는 상품이 가진 특수성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생활의 터전이자, 대다수 개인이 구매하는 가장 비싼 재화입니다. 평면과 채광, 조경과 커뮤니티는 일상의 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치 상승과 환금성 등을 위해 입지와 교통, 학군 등이 미래 자산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소비자가 아파트에 기대하는 프리미엄은 '사는 곳(Living)'과 '사는 것(Buying)', 소비자가 아파트에 기대하는 프리미엄은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두 가치가 브랜드 안에서 동등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잘 지어진 구조와 편리한 시설은 경쟁사가 따라 할 수 있고, 시공 품질에 대한 신뢰는 사고나 하자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반면 좋은 입지는 쉽게 복제할 수 없습니다. 자산으로서의 집을 바라볼 때, 소비자는 생활의 편의만큼이나 희소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 가치를 지켜 줄 이름을 원합니다.
좋은 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은 좋은 지위를 가졌다는 인식으로도 이어집니다. 2000년도에 브랜드 아파트를 선택하면서 브랜드를 위계질서로 인식되게 만든 사람들과 2025년에 '압구정'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좋은 집'이나 '비싼 집'만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자산가치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 집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브랜드는 이 둘을 한꺼번에 증명하는 표지가 됩니다.
이런 자부심은 감정에 머물지 않고, 숫자로 뒷받침됩니다. 2023년 한국정보기술학회지에 실린 연구는 서울시 실거래 22,014건을 딥러닝으로 분석해, 일반 브랜드 아파트에 약 1억 9천만 원, 하이엔드 브랜드 아파트에 약 16억 3천만 원의 가격 프리미엄이 붙는다고 추정했습니다. 주거브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만난 부동산 전문가는 저에게 저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프리미엄 브랜드라고 하면 가격 차이가 1억 이상은 기본이죠. 입지나 환경이 동일한데도 말이죠."
이렇게 지위의 표현이 기능적 차별화보다 중요해지면, 브랜드는 고급스러움을 인정받는 공통의 코드를 따르기 쉽습니다. 명품 브랜드들이 절제된 표현과 정통성을 공유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개성을 드러내는 일보다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알아보게 하는 일이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거 브랜드의 포지셔닝은 위와 아래가 선명하고, 옆으로의 차이는 희미한 1차원적인 형태가 됩니다. 이런 구분은 시장 뿐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가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아파트 브랜드 계급도'는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황제, 귀족, 사대부, 중인, 평민이라는 신분제의 어휘가 그대로 등장합니다. 개별 순위에는 이견이 많아도, 그 도표가 전제하는 위계 자체는 낯설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위 브랜드는 상위 브랜드와 대등한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주려 하고, 상위 브랜드는 다시 그들과의 거리를 벌리려 합니다. 모두가 '라이프스타일', '품격', '존중'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을 제안하는 경쟁보다, 같은 사다리에서 더 높은 칸을 차지하는 경쟁이 치열한 것입니다.
'깊이'라는 말로 다시 이야기하는 높이
이제 래미안의 리뉴얼로 돌아가 봅시다. 래미안은 이미 하이엔드 브랜드와 겨룰 만한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복잡한 사정은 끼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계급도를 살펴보면, '래미안'과 '래미안 원베일리'가 서로 다른 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래미안'과, 고급 입지에 위치한 '래미안'을 달리 보고, 뒤에 어떤 이름이 붙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0년 넘게 여러 지역과 단지에 적용된 브랜드라면 피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존 단지와 새 단지의 조건은 다르고, 새로운 입주민은 이전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래미안을 비롯한 많은 브랜드는 개별 단지에 별도의 이름을 붙이며 이 요구에 대응해 왔고, 이는 사실 래미안 뿐 아니라 모든 브랜드들이 최근 상급지에서 브랜드 가치 유지를 위해 대응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점점 길고 복잡해지는 아파트 이름은 그 기대가 누적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브랜드 뒤에 붙은 이름이 본래의 이름보다 더 강한 가치를 갖게 되면, 중심 브랜드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급 입지로 갈수록 기존 이미지가 도움이 되기보다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구정에서 등장한 '컬리넌'이라는 제안도 이런 맥락에서 읽힙니다.
제게 이번 리뉴얼은 그 주도권을 다시 '래미안'이라는 이름으로 가져오려는 작업으로 보입니다. 개별 단지명에 기대기보다 브랜드 전체의 격을 끌어올리려는 것입니다. 초록을 지우고 흑백을 택한 선택은 디에이치의 퓨어 블랙, 르엘의 '드러나지 않는 럭셔리', 아크로의 절제된 검정과 가까운 언어입니다. "높이에서 깊이로"라는 새 슬로건 또한 높이 경쟁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처럼 들리지만, 사실 절제와 정제, 드러내지 않음은 이미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공유하는 문법입니다. '럭셔리'라는 말을 앞세우는 대신 엄격한 기준과 안목을 이야기하며, 가치를 알아볼 사람은 알아볼 것이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깊이'도 그 목록에 새로 들어온 단어일 뿐입니다.
결국, 래미안은 높이 경쟁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 높이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높이를 말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비판하면서도 갖고 싶은 브랜드
이런 브랜딩에는 모순된 요구가 따라붙습니다. 여러 차례 진행했던 주거 브랜드 관련 조사에서, 사람들은 '과시적인 브랜드는 졸부같아서 싫고 촌스럽다'는 말과 '내 가치를 누구나 한 번에 알아줄 때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을 동시에 합니다. 주거 브랜드는 이 두 말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합니다. 조금만 과하면 촌스러운 과시가 되고, 조금만 약하면 존재감이 사라집니다.
고급화 경쟁이 반복될수록 희소성도 약해집니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늘어나면서 그 이름의 특별함이 희석된다는 기사도 이미 나온 바 있습니다. 새 브랜드가 등장하면 기존 단지에서도 적용을 요구하고, 조합은 수주 조건으로 하이엔드를 내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노이즈로 작용합니다. 이미 조합이 하이엔드 적용을 조건으로 걸었다가 유찰 또는 계약 해지, 소송을 겪었다는 사례가 여럿 나오고 있으니까요. 적용 범위가 넓어지면 다시 그 위의 등급이 필요해집니다. 이러다 언젠가 '하이엔드 위의 하이엔드'라는 이름까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브랜드 이미지는 몇 년마다 바꿀 수 있어도, 그 이름과 디자인을 붙인 건물은 수십 년간 도시의 풍경으로 남습니다. 새로운 이미지와 오래된 실체 사이의 간극이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이는 수주와 분양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발전해 온 주거 브랜딩의 구조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브랜드의 경험을 일관되게 관리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아파트의 경험에는 분양대행사와 시공 현장, 사전점검업체, 관리사무소 등 수많은 주체가 관여합니다. 브랜드팀이 내건 약속이 이 과정 전체를 관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브랜드의 가치는 실제 생활보다 이미지 속에 머물기 쉽고, 부실시공 뉴스나 내 집의 하자는 그 믿음을 단번에 무너뜨립니다.
그럼에도 상위 브랜드는 비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소유하고 싶은 대상으로 남습니다. 불만을 말하다가도 "그래서 다른 (하위 브랜드) 아파트로 갈 거야?"라는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립니다. 브랜드가 가격과 지위를 보증하리라는 기대가, 그것을 대체할 기준보다 훨씬 공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안에 대한 빈곤한 상상력
다른 방향을 시도한 브랜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009년 대림산업(현 DL이엔씨)의 e편한세상은 '진심이 짓는다' 캠페인에서 유명 모델이나 화려한 이미지 대신 '10cm 더 넓은 주차장' 같은 생활의 세부를 이야기했습니다. 설계의 차이를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전달한 드문 사례였습니다. KCC건설의 스위첸 역시 프리미엄을 과시하기보다 집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 왔습니다. 다만 캠페인에 대한 호감이 브랜드의 위계를 넘어서는 선택으로 이어지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파트 바깥에서는 공유주거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에피소드, 커먼타운, 맹그로브, 홈즈스튜디오, 로컬스티치 같은 브랜드는 자산의 소유보다 생활과 커뮤니티를 제안했습니다. 파는 것이 달라지니 브랜드의 언어도 달라졌습니다. 다만 이런 시도가 지속되려면 이미지나 메시지를 넘어 사업의 수익성과 운영 구조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새로운 주거상을 제안하는 일과 그것을 오래 유지하는 일은 다른 과제입니다.
공공주택은 더 단단한 벽에 부딪혔습니다. 주공그린빌, 뜨란채, 휴먼시아, 천년나무 등 이름을 바꾸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공공주택을 향한 위계적 시선을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일부 이름은 '휴거' 같은 차별적인 멸칭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시도는 2020년 10월에 나온 '안단테'로, 개발비 5억 원에 홍보비 약 90억 원을 썼음에도 2025년 11월 기준으로 LH가 공급한 54개 단지 가운데 지금 안단테를 유지하는 곳은 한 곳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시공사 브랜드나 입주민이 공모한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게는 협동조합형 임대주택을 표방하는 위스테이가 비교적 진취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사회혁신기업 더함이 참여한 이 브랜드는 '사는 것'보다 '사는 곳'에 무게를 두려는 시도였습니다. 눈에 띄는 디자인보다, 집을 선택하고 함께 살아가는 기준을 달리 제안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가 과연 주류를 이루고, 주거 브랜드, 나아가 주거에 대한 상식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이 남습니다.
이 거리감과 회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존 위계의 옆에 서려는 시도조차 그 아래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기준을 제안해도 결국 익숙한 가격과 지위의 척도로 되돌아가 평가하는 것입니다.
순우리말 아파트 이름의 운명도 이 구조를 보여줍니다. 국어문화원연합회 조사에서 외국어 아파트 이름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5%였고 우리말 이름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49.1%였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외래어 단지명의 범람을 우려하며 1기 신도시의 우리말 이름을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브랜드와 단지명을 지어야 할 때만큼은, 사람들은 외래어를 선호하는 듯 합니다. 새로운 단지명에 우리말 이름을 쓴 사례는 제 기억으로는 '목동윤슬자이'밖에 기억나지 않고, 브랜드 리뉴얼로 가면 금호건설은 '어울림'을 버리고 '아테라'를, 한화건설은 '꿈에그린' 대신 '포레나'를 내놓았습니다. 기존 꿈에그린 단지가 포레나로 이름을 바꾸기 위해 브랜드 사용료를 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름에 값이 붙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드뭅니다.
이름값 그 이상의 주거 브랜드는 가능한가
10년 넘게 일하며 적지 않은 주거 브랜드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집에 브랜드를 붙이는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주택개발은 개발과 건설, 금융이 결합한 거대한 사업이고, 브랜딩은 그 사업의 연장선에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주거 브랜드는 분양 단계의 기대를 바꾸고 시장의 평가에 영향을 주며, 장기적인 자산 프리미엄의 인식에까지 닿습니다. 문제는 그 효과가 그 집에서 살아갈 사람의 일상에 얼마나 돌아오느냐는 것입니다. 브랜드가 만들어 내는 가치는 생활의 개선보다 거래와 가격의 언어로 훨씬 쉽게 설명되고, 브랜드의 작용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그 집에 사는 사람보다는 주택이라는 상품을 짓고 시장을 유지시키는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나중에 집을 팔 때 조금 더 유리해지는 것, 사람들을 위계로 나누는 것, 남달라 보이지만 결국 모두가 원하는 '프리미엄한 기분'을 주는 것. 그 밖에 주거 브랜드가 제공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브랜딩을 하는 가슴 속에 늘 남아 있었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대신 저는 교묘하게 질문을 바꾸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넘겨 왔습니다. '브랜드가 중요한가'가 아니라, '브랜드는 무엇을 바꾸는가'로 말이죠. 앞선 인사이트들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래미안의 리뉴얼과 압구정의 요구를 보며, 저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이엔드가 되기 위해 결국은 1위 브랜드가 장식과 색상, 노출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장식과 색상을 걷어내면 끝내 이름이 남습니다. 어쩌면 색상이 있었을 때도 사정은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값은 무엇이 지탱하고 있을까요?
사실 주택에서 브랜드보다 더 강한 가치를 꼽으라면 입지일 것입니다. 압구정의 사례는 잘 쌓여올려진 입지가 건설사가 쌓아 온 이름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그 입지들은 좋은 브랜드를 탐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굳히고자 합니다. 브랜드는 좋은 입지를 차지하며 가치를 높이고, 그 입지는 다시 브랜드의 명성을 뒷받침합니다. 이 순환에서 과연 브랜드 자체에 남아 있는 가치가 있는 걸까요?
그래서 제게 래미안의 새 색상보다 오래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거 브랜드는 자산의 보증서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집을 위계 바깥의 기준으로 선택하게 할 수 있을까. 다른 방향을 시도한 사례는 있었지만, 그 시도가 시장의 중심을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까지 뚜렷한 성과를 낸 쪽은 대체로 기존의 위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높인 브랜드였습니다. 집이 '사는 곳'이면서 '사는 것'인 한 이 긴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만들어 온 브랜드는 후자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 있었다는 것이 브랜드 기획자로서의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 반대쪽으로 가는 브랜드가 나올 수 있을까요? 나온다면 그 브랜드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접어둔 채, 다른 건설사에서 자기 브랜드를 흑백으로 바꾸자는 프로젝트가 몇 건 더 들어올 것 같다는 예감이 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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